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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꿈과 희망, 지혜의 등대 고성도서관

공룡나라 책 읽는 고성

열린마당

고성 송학동 고분군

  • 고성읍 북쪽의 무기산 일대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7기 가량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소가야(小加耶)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에는 겉모양이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았다 하여 한일양국 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제1호분도 위치하고 있다.

    1999년부터 동아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분군의 특징과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첫째, 모든 고분의 봉토(封土)는 인공으로 다져 쌓아 올려졌다. 언덕 위를 평평하게 고른 뒤 한 켜씩 다져가며 쌓아 올린 판축(版築)의 기술이 확인되었다.
    둘째, 제1호분은 모두 17개의 돌덧널과 돌방으로, 3개의 독립된 둥근 봉토를 가진 고분이 합쳐진 것으로 판명되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다른 모양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셋째,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B-1호 돌방은 전통적 가야고분과는 다른 모양인데, 입구․돌벽․천장에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넷째,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마구(馬具), 금동장식큰칼, 청동제높은잔,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어 소가야 왕릉의 면모를 짐작케 해 주었다.
    다섯째,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통해 고분군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경에 조성되었던, 소가야의 중심고분으로 소가야의 지배자 집단 또는 왕릉급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으며 이 고분이 자리한 고성군 소가야의 옛 터로 알려져 있다.

운흥사 괘불탱 및 궤

  • 영산회는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비는 법회이고, 괘불탱은 야외법회 때 펼쳐 당간지주(幢竿支柱) 등에 걸어 놓는 대형불화이며, 궤는 불화를 보관하는 상자이다.

    가로 768㎝, 세로 1,136㎝의 괘불탱에는 선 모습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여러 불상이 화면 가득히 그려졌다. 중앙 석가모니불의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고, 위에는 합장한 타방불(他方佛) 두 분을 안쪽에,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바깥쪽에 작게 그려 배치하였다.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그려진 석가모니불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두터운 법의(法衣)를 걸쳤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아 자연스레 내렸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가슴에 올려 엄지․중지․약지를 살짝 구부렸다. 장대한 신체와 넓은 어깨, 두터운 법의는 석가모니불의 무게를 더하고, 어깨에 닿을 정도로 처진 귀는 부처의 자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괘불탱 아래의 좌우에는 제작경위가 적힌 화기(畵記)가 있다. 화기에는 1730년[雍正八庚戌春, 영조6년]에 의겸스님[義謙比丘]이 대표[金魚]가 되어 제작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뚜껑 안쪽에는 괘불탱이 만들어진 1년 뒤인 1731년[雍正九年辛亥] 3월부터 7월까지 여러 공인들이 함께 제작하였음이 먹으로 쓰여있다. 이 궤는 당시의 금속공예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성 옥천사지장보살 및 시왕도

  •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는 1744년 화승 효안(曉岸)의 주도하에 11명의 화승들이 참여하여 조성되었다. 현재 제1진광대왕도와 제2초강대왕도가 결실되어, 지장보살도 1점과 시왕도 8점이 남아 있다. 이 9점의 불화와 함께 옥천사에는 1744년 효안이 제작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가 전하였으나, 현재 도난당하여 남아 있지 않다.

    지장보살도는 화면 중앙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그 좌우를 2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2보살을 그리고, 상단에 대칭으로 6보살을 배치하였다. 상단의 6보살 중 지장보살의 좌우 보살은 정면상을 취하고, 나머지 권속들은 중앙의 지장보살을 바라보게 표현하여 화면의 구도가 짜임새 있고 안정적이다.

    시왕도는 한 폭에 각 1위(位)의 시왕을 묘사한 형식을 취하였다. 각 화면은 용두가 장식된 의자에 좌정한 시왕과 권속을 상단에 크게 배치하고, 하단에 채운(彩雲)으로 화면을 구획하여 각 시왕에 해당하는 지옥 장면을 묘사하였다. 화면 상단에는 각 시왕의 권속들이 배치하고, 하단에는 지옥장면이 묘사 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시왕도는 1742년 범어사 시왕도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졌으나, 범어사 시왕도는 현재 소장처를 알 수 없다.

    이후 시왕이 각각 1폭으로 조성되는 시왕도는 옥천사 시왕도에 시왕의 의자 뒤로 병풍을 추가한 형식이 다수 제작되었다.1764년 시왕도(호림박물관 소장)나 1798년 통도사 시왕도 등이 그 예에 속하며, 이는 18세기 후반 시왕도의 전형이 되었다. 현재 옥천사 지장보살도는 색의 오염과 화면 꺾임 등의 현상이 나타나지만, 본존과 다른 권속들의 상호는 원형이 잘 남아있는 상태이다. 시왕도는 개체한 흔적이 없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지장보살도와 제9도시대왕도는 바탕천의 재질이 비단이며, 나머지 7점의 시왕도는 모시바탕에 제작되었다.

    18세기 명부전 불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성옥천사 청동북

  • 청동북은 옛날에 군대나 절에서 쓰던 금속으로 만든 북의 일종이다. 고성 옥천사 청동북은 옥천사가 소장하고 있는 1252년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청동반자(靑銅飯子)이다.

    청동북에 새겨진 명문에는 원래 지리산의 안양사(安養寺)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옥천사에 소장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청동북이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연대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안양사가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2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안양사에서 사용되다가, 안양사의 폐사되면서 옥천사로 옮겨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북의 표면 직경은 55㎝, 측면 넓이는 14㎝이다. 북을 두드리는 쪽에는 테두리를 포함해 5㎝ 넓이의 간격으로 4개의 동심원이 두터운 돋을새김 선으로 돌려 있고, 뒷면은 소리를 내기 위해 꽹과리처럼 비어 있다.
    표면의 정 중앙에는 많이 두드렸던 흔적과 6개의 동그란 꼭지가 돋아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동심원 사이에는 겹으로 된 연꽃문이 있다.가장자리에는 당초운문(唐草雲文)이 돋을새김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청동문의 측면에 새겨진 187자의 명문에는 제작시기, 제작자, 절과 시주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불교미술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성 계승사 백악기 퇴적구조

  •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으로,절 입구 왼쪽 요사체 앞 너른 암반에는 연흔(물결자국)이 있다. 이 곳의 연흔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가로 13.5m, 세로 7m정도 되며 보존 상태도 우수하다. 또 옛 대웅전 뒤쪽에는 우흔(雨痕:빗방울 자국)이 남아 있는데 그 무늬가 너무난 선명하여 마치 금방 생긴 자국처럼 또렷하다. 물결의 파장과 파고는 각각 4mm정도이다.

    그 뒤쪽 약 50㎡정도 되는 암반에는 공룡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용각류(네다리로 걷는 초식공룡)의 발자국이 7개 있는데 각 발자 국의 평균 크기는 각각 67㎝,90㎝ 정도이다. 그밖에 이 지역에는 퇴적구조 층리와 수각류(두 발로 걷는 육식공룡)로 추정되는 공룡발자국 화석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환경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곳의 암석과 암벽은 모두 백악기의 퇴적구조로, 퇴적층이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

  • 이 곳의 고생물 화석은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지층에 남아 있으며,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로는 양적으로나 다양성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곳이며, 중생대 새발자국 화석지로는 세계 최대이다.

    덕명리 상족유원지에서 실바위까지 6km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2,000여 개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남아 있고, 도요새 및 물떼새의 발자국 화석도 많이 남아 있다. 이 곳에 발자국을 남긴 공룡들로는 발톱고성룡[Goseongosauripus onychion]을 비롯한 이구아나룡 종류, 발굽울투라룡[Ultrasauripus ungulatus]을 비롯한 울트라룡 종류, 중간 크기와 작은 크기의 용각류 공룡, 네발로 걷는 초식성 공룡, 육식성 공룡인 큰룡[Megalosauropus] 등이다.

고성 오광대

  • 고성 오광대는 고성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다. 이 놀이는 경상도 초계 밤마리 장터 대광대패의 탈놀이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본래는 정월 대보름 축제에 놀았으나 나중에는 봄, 가을에 노는 것으로 오락화되었다.

    고성 오광대는 5과장으로 구성된다.
    제1과장 문둥광대에서는 문둥이가 소고를 들고 나와 구성지게 춤을 추고, 제2과장 오광대에서는 양반들이 춤을 추고 하인 말뚝이가 양반을 희롱하며, 제3과장 비비에서는 괴물 비비가 양반을 잡아먹으며 희롱하고, 제4과장 승무에서는 중이 각시와 어울려 춤추는 것을 풍자하며, 제5과장 제밀주에서는 큰어미가 영감을 사이에 두고 제밀주와 다투다 죽어 상여가 나가는 처첩관계를 풍자한다.

    고성 오광대는 춤과 재담, 소리와 몸짓으로 이어나가는 데 특히 덧배기 춤이 돋보인다.

    고성 오광대는 통영 오광대와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있으나, 더욱 고형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다.